건설현장에서 지게차나 크레인 같은 건설기계를 빌리면서 기사(운전 노무)까지 함께 제공받는 계약, 실무에서 정말 흔하죠. 그런데 이 건설기계 기사의 과실로 다른 근로자가 다치는 사고가 나면, 근로복지공단이 재해근로자에게 보험급여를 지급한 뒤 '건설기계 임대인'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할 수 있을까요? 2026년 1월,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오래된 쟁점에 대해 기존 판례의 판단 기준을 새롭게 정리하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. 오늘은 이 판결의 내용을 정리해봅니다.
1. 사건의 개요
● 종합건설회사 A는 고속도로 공사 중 토공 및 구조물 공사를 원수급인으로부터 하도급받았습니다.
● A는 피고 2로부터 지게차를 빌리면서, 운전 노무까지 함께 제공받기로 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.
● 피고 2가 고용한 근로자(피고 1)가 A의 현장에서 A 소속 근로자(A-1)의 수신호에 따라 지게차를 운전하다가, 철근 묶음이 A-1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.
● 이 사고로 A-1은 경부 척수손상 등 중대한 상해를 입었고, 근로복지공단이 보험급여를 지급한 뒤 피고 1, 2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했습니다.
2. 쟁점 — 산재보험법 제87조 제1항의 '제3자'란?
산재보험법 제87조 제1항은, 공단이 제3자의 행위로 인한 재해에 대해 보험급여를 지급한 경우 그 급여액 한도에서 재해근로자의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한다고 규정합니다. 다만 보험가입자인 둘 이상의 사업주가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사업을 분할해서 각각 수행하다가, 사업주를 달리하는 근로자의 행위로 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대위가 제한됩니다(단서).
결국 공단이 구상금을 청구하려면 상대방이 ①'제3자'에 해당해야 하고, ②단서에도 해당하지 않아야 합니다.
3. 기존 판례의 법리 — '산재보험료 부담관계' 기준
종래 판례는 '제3자에 해당하는지'를 산재보험료의 부담관계로 판단해왔습니다. 즉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제9조 제1항에 따라 보험료를 부담하는 원수급인을 매개로 재해근로자와 직간접적인 산재보험관계가 인정되어야 제3자에서 제외된다는 논리입니다.
이 기준에 따르면:
● 동일 사업주에게 고용된 동료 근로자 → 제3자 아님
● 원수급인 소속 근로자와 하수급인 소속 근로자 → 제3자 아님
● 하수급인과 그 소속 근로자 → 제3자 아님
● 건설기계 임대인(및 그 소속 기사) → 원수급인의 근로자도, 하수급인도 아니므로 산재보험관계가 없음 → 제3자에 해당 → 구상금 청구 가능
즉 같은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똑같은 유형의 사고라도, 계약 형태가 '건설기계 임대차+운전노무 제공'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단의 구상이 허용되어 온 것입니다.
4. 전원합의체의 판단
가. 다수의견 — 기준을 '위험의 공유'로 전환
대위권의 행사 범위는 보험료 부담관계가 아니라, 근로자들이 동일한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업무상 재해에 관한 '공동의 위험관계'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.
다수의견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.
● 산재보험법 제87조 단서의 취지는 결국 재해근로자에 대한 최종 보상책임을 공단이 질 것인지의 문제이고, '제3자'의 의미는 법률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 법원의 해석에 맡겨져 있다.
● 산재보험은 업무상 재해라는 사회적 위험에 보험방식으로 대처하는 사회보험제도다. 가해자 역시 노무제공 과정에서 재해근로자와 위험을 공유하는 위치에 있었다면, 그런 가해자에 대한 대위를 제한해도 부당하게 책임을 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.
● 기존 판례가 동료 근로자·하수급인을 제3자에서 제외해온 것도, 실은 산재보험료 부담관계만이 아니라 '사업장 내 위험의 공유'라는 관점이 이미 근저에 있었다.
● 원수급인이 건설기계 작업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①임대차+운전노무 제공 ②재하도급 ③자기 근로자를 통한 직접 운전 등 여러 선택지가 있는데, 사고 위험의 실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. 유독 ①의 방식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상 가능 여부가 갈리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이 떨어진다.
나. 오석준·서경환 대법관의 별개의견 — 결론은 같지만 이유가 다르다
별개의견은 이 사건에서 구상을 부정하는 결론에는 동의하지만, '위험의 공유'라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하는 데는 반대합니다.
● 종전의 '산재보험관계' 기준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도 타당하다. 다만 건설기계 임대인에 대해서는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제9조 제1항의 '도급사업 일괄적용 규정'을 유추적용해, 원수급인이 그 산재보험료를 부담하는 것으로 보아 산재보험관계를 인정하면 된다.
● 공단의 대위권 행사는 손해보험에서의 보험자대위(상법 제682조 제1항)와 본질이 같아, 보험관계와 완전히 분리해 판단할 수 없다.
● '위험 공유'라는 기준은 그 자체로 불명확하여, 법령과 같은 수준의 직접적·보편적 기준으로 삼기에는 신중해야 한다.
● 다수의견처럼 대위 문제를 산재보험관계로부터 절연시키면, 가해자 소속 사업주의 산재보험 가입 여부와 무관하게 대위 여부가 결정되는 등 이론적 부정합이 발생할 수 있다.
● 근로자파견, 비건설업종에서의 건설기계 임대차 등 이 사건에서 다투어지지 않은 사안까지 미리 상정해 법리를 전면 수정하는 것은 구체적 사건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법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.
다. 다수의견에 대한 노태악 대법관의 보충의견 — 별개의견의 한계 지적
보충의견은 별개의견이 제시한 '도급사업 일괄적용 규정의 유추적용' 논리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안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.
● 비건설업종(예: 제조업) 사업주가 건설기계 임대차·운전노무 제공 계약을 체결한 경우
● 근로자파견 관계에서 사용사업주 소속 근로자와 파견근로자 사이에 사고가 발생한 경우
● 노무제공자(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등)가 사업주와 계약을 맺고 노무를 제공하다가 그 사업주가 고용한 다른 근로자와 사고가 발생한 경우
이런 경우들은 도급사업 일괄적용 규정을 유추적용할 여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. 특히 파견근로자와 사용사업주 소속 근로자는 오히려 분할도급 사안보다 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공동작업을 수행하는데, 별개의견의 논리대로라면 이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서로 '제3자'가 되어 구상이 허용되는 불균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.
5. 실무적 시사점
● 건설기계를 임대하면서 운전 노무까지 제공받는 계약을 체결한 경우, 이제는 그 건설기계 기사의 과실로 인한 사고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임대인 측에 구상금을 청구하기 어려워졌습니다.
● 판단 기준이 '보험료 부담관계'라는 비교적 명확한 잣대에서 '위험의 공유·발현 여부'라는 다소 규범적·평가적인 기준으로 이동한 만큼, 향후 근로자파견이나 비건설업종의 유사 사안에서도 같은 법리가 어디까지 확장될지가 주목됩니다.
● 보험자대위 법리와의 정합성, 산재보험 가입 여부와의 관계 등은 별개의견과 보충의견 사이에서도 여전히 다투어지는 지점이므로, 후속 판례의 축적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.